- 글번호
- 5270
제 19 묘역 소개
- 작성일
- 2018.05.15
- 수정일
- 2022.02.08
- 작성자
- 현충원
- 조회수
- 1539
개요 및 안장 현황
제19묘역은 베트남전 전사자와 그 이후 순직하신 분들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묘역으로 9개판으로 총 913위를 모시고 있다. 2008년 10월 19일 (주)SKC와 자매결연이 체결되어 년2회 헌화와 묘역 환경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도 | 계 | '50년 이전 | 6・25전쟁중 | '54~'59 | ‘60~’69 | ‘70~’79 | ‘80~’89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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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913 | 2 | 417 | 25 | 367 | 78 | 21 | 3 |
안장 | 913 | - | - | 361 | 438 | 89 | 21 | 4 |
안장배경
양구전투
‘51년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회담여건 조성과 한 치라도 더 많은 국토회복을 위해 양구전투에서 불타는 청춘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피의 능선 전투(‘51. 8. 18∼8. 22)
국군5사단과 미 2사단이 적 12사단 1연대와 27사단이 점령한 983고지일대를 빼앗기 위해 집중공격하게 된다. 이 고지는 적에게는 천연적인 방어를 제공하고 아군에게는 “눈 위의 혹”같아서 서로 983-938-773일대의 고지 군을 점령하기 위해 싸운 전투였다. 이 전투로 인해 적은 사살만 1,250명에 이르렀고 아군 역시 전사상자를 포함 1,030명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루 평균 3만여발, 최고 5만여발의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적이 설치한 2,000여발의 대인지뢰로 인해 수많은 발목절단 부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결사적 전투로 고지를 탈환하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1차:‘51. 9. 13∼ 9. 26, 2차:10.5∼10.13)
‘51년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회담여건 조성과 한 치라도 더 많은 국토회복을 위해 양구전투에서 불타는 청춘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양구전투
30여일간 미 제 2사단과 적 6사단, 12사단이 격렬하게총력을 경주한 전투로서 1일 평균 45회의 전폭기 출격과 1일 평균 1,000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931고지 일대에만 30여만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전투는 결국 적에게 1,470명의 전사자와 22,600명의 전상자를 안겨준 채 미 제2사단의 승리로 끝나 공산측은 휴전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아군 피해도 커 597명이 전사하고 3,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백석산 지구 전투(1차:51. 9.24,∼9.27, 2차: 9.30∼10.1)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출이 부진했던 시기에 국군 제7사단이 적 32사단, 12사단과 접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적 사살856명, 포로760명의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아군의 피해는 적었지만 전사 95명, 부상 29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중동부전선이 4키로 이상 북상하였고 인접부대의 진출을 엄호하면서도 서쪽고지군 일대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솔산 지구 전투(51, 6, 4∼6.19)
최초 미 해병 1사단이 공격을 담당하였으나 상당한 손실만을 입은 채 물러나고, 뒤이어 한국군 해병 1연대가 최초로 산악 전투에 투입되어 적 12사단을 격퇴하고 쾌승을 거둔 전투이다. 해병 1연대는 16일간의 전투에서 24개의 고지군을 탈취하고 칠흙같은 밤과 안개속에서도 귀신같이 적을 찾아내어 궤멸시켜 최초 “귀신잡는 해병”이란 칭호를 얻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전투로 3,263명의 적이 사살되었고 아군은 115명의 전사자와 603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가칠봉 지구 전투(1차:51.9.4∼10.14, 2차 : 10.27∼10.31)
국군 5사단이 2차에 걸쳐 적 2사단과 7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려 사살1,604명과 포로 270명 등 전과를 거두고 가칠봉을 확보한 전투이다. 특히, 김일성이 전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를 수차례 걸쳐 공격하여 종전 이후 155마일 휴전중 가장 높은 곳에서 적을 발아래 관측할 수 있는 고지인 가칠봉 1242미터를 수중에 넣었다. 이 전투로 아군은 전사 824명, 부상 4,200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임병래 중위[19묘역 5판 62호]
1950년 9월 15일에 감행된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맥아더 사령부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정보를 수집,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여 정보요원인 임병래 중위 등은 인천 시내에서 6.25전 해군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던 북한의 정보요원 2명을 포섭하여 이 지역에 배치된 병력, 장비위치, 경계상태, 지뢰부설 여부 등 중요한 군사첩보를 획득하고 서울, 수원 일원을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적 상황과 군사기밀을 탐지해 우리 해군본부와 극동군사령부에 첩보를 제공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아군의 공작활동을 간파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임중위는 지연전으로 맞서 싸우다 대원들만 탈출시킨 후 퇴로가 차단된 전장 후미에서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 작전에 심대한 영항이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권총으로 자결(1950년 9월 10일)했다.
진두태 중위[19묘역 5판 1호]
1951년 3월8일 대관령 공격작전에서 수색 소대장으로 정찰 중 매복한 적에게 포위되었으나 부하들을 먼저 안전하게 철수시킨 후 단독으로 적과 교전, 여러명을 사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적과 교전시 언제나 선두에서 비호같은 동작으로 적을 소탕해 생전에 해병중의 해병으로 칭송받았다. 특히 마지막 순간에도 부하부터 살리고 자신은 조국의 전선에 목숨을 바치는 진정한 군인정신을 발휘했다.
이태영 중령[704함 함장] [19묘역 5판 25호] 등 31위
1951년 12월 24일 704호 함장으로서 동해안 봉쇄작전 명령을 받고 원산해역으로 출항했다. 이때 원산 영흥만을 경비하던 한국과 유엔군 해군 함정들은 적 해안포의 치열한 공격을 받자 대부분 안전지역으로 이동해 임무를 수행했으나 이 소령이 이끌던 704함은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 적의 포진지를 제압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틀 뒤에는 북한군이 야음을 틈타 은폐해 두었던 기뢰와 각종 보급품을 원산항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 소령은 폭설과 거친 파도에도 불구하고 해안으로 신속히 접근해 적의 보급품 집적소를 파괴시켰다. 그러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외해로 나오던 중 704함은 폭설과 풍랑속에서 적의 기뢰에 접촉되어 함장 이태영 소령 이하 승조원 57명 전원이 애함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57위중 19번 묘역에는 31위가 안장되어 계시며, 21번 묘역에는 7위가 안장,시신을 찾지 못한 19위는 위패로 모셔져 계시다.
당포함 사건
'66. 12. 28일 당포함은 동북 최북단 NLL 근해에서 명태때를 쫓아 북쪽으로 이동하며 조업 중인 200여척의 명태잡이 어선들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어로선단을 보호하던 중 '67. 1. 19일 무장한 2척의 북한 함정을 발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위해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중 2척의 PBL북한경비정이 NLL을 침범해 평화롭게 조업중인 우리어선의 납북을 시도하여우리 어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 함정을 향해 돌진하자 북한122mm 육상해안포대가 280여발의 기습 포격을 감행해 어로선단의 방패역할을 하면서 함포 170여발을 응사하는 등 교전했다.
그러나 집중사격을 받은 당포함은 애석하게도 39명의 전우들과 함께 침몰하였으나 승조원들의 값진 희생으로 민간인 사상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이는 국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고 산화한 대한민국 해군용사들의 용맹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67. 1. 20일 해군에서는 당포함과 함께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동해 겅비함대 기함 함상에서 당시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 넋을 위로하였다, '69. 1. 27일 해군장으로 엄수하여 이곳 국립서울현충원 19번 묘역(4위)과 21번 묘역(39위)에 안장하였으며, 이들 전사자 모두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 및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이희섭 준위[19묘역 4판 144호]
통한의 해군 YTL 사건은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8분경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항 남쪽 700m 해상에서 해군․해경 신병과 기간사병 311명, 승무원 5명 등 316명이 탄 해군 YTL(120톤 예인선) 전복 침몰하여 총 159명이 순직한 참사이다. 이중 157위는 56묘역 1판 1846〜2002호, 1위는 21묘역 2판 1537호에 모셔져 계시다.
신병들은 이날 해군의 시조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한산도 제승당과 충렬사를 참배한 후 모함인 LST-815 ‘북한함’으로 귀함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급선회를 시도하다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사고 해역에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초당 최대풍속 18m의 강풍이 불어 파도가 높았고, 기온마저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해군은 사고 즉시 함정 4척을 급파, 피항하던 어선 10여척을 동원해 함께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승무원 3명, 기간사병 3명, 신병 153명은 끝내 구조하지 못했다.
침몰 사건으로 순직한 장병들 155명은 사건 발생 다음 달인 3월 3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안장되던 날 오후 실종자 4명 중 3명의 시신이 인양되어 함께 안장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1명(김홍두 해군일병)은 2개월 뒤인 5월 25일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전체 인원의 절반이 넘는 젊은 군인들이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을 가져온 대참사로 꼽히고 있다.
추모의글
해병상병 박흥록(2489호)
록아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가고 광명한 천당에 너 먼저 가 인애한 주 모시고 섯는 것 영원히 네 영광 되었도다. 우리가 후일에 다시 만나 다 함께 같이 누릴 참 영광이로다
해병상병 엄영웅(2526호)
사랑하는 내 아들 장한 내아들 영웅아 언제나 외롭게 생각에 잠긴 듯한 네 모습 순경하기만 했던 네 마음 한번다시 내 품에 너를 안아봤으면 새벽 이슬을 머금고 필려다 시들은 한송이 들꽃인양 아쉬움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진 네 젊음 비록 네 짧은 인생의 길이였지만 조국과 겨레위한 숭고한 길이었기에 엄마는 울지 않고 웃으며 살아가련다. 아~ 장한 내아들 고히 잠들어라
묘역위치 : 2547호/육군하사 양승오
장한 내 아들아! 엄마는 외롭지 않다 비록 네가 내 곁에 없어도 넌 겨레의 넋이 되었거니
묘역위치 : 2494호/해병병장 임복성
싱겁게 웃던 네 모습 언제 또 보나 정겹게 속삭이던 네 목소리 언제 또 들어보나 조국위해 바친 목숨 영혼이 되어 고히 잠든 네 모습 꿈속에서 만나면 웃는 얼굴로 보여주렴 아쉬움만 남긴 채 영원히 사라진 네 젊은 청춘 엄마는 울지 않고 웃으며 살아가리 아 ~ 장한 내아들 고히 잠들거라
묘역위치 : 2626호/육군중사 서응규
짧은 七년 사랑의 얘기가 짧은 날에 영원한 조국 하늘과 함께하신 당신에게 뜨거운 사랑을 드립니다.
묘역위치 : 183호/해군중령 박종빈, 배위 서경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셨던 아버님 어머님! 지상에서의 짧은 만남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하시길 기도합니다. 행복하세요 진정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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