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묘소
이승만 대통령의 묘역은 면적 1,653m²로 대통령 내외의 합장 봉분, 묘비와 헌시비,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하여 독립협회 참여, 매일신문 창간, 상해임시정부 활동, 구미위원회 조직 등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투신하여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해 제헌의회 초대의장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정부 수립 및 반공사상 확립 등 많은 공헌을 남겼으나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후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였으며, 7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
1992년 3월 19일 서울에서 서거하여 1992년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묘소 앞에는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에서 채취하여 제작, 건립한 헌시비가 있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재건립한 묘비는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일인 1998년 8월 15일 각계 인사를 초청,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내외분묘비
전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
후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建國 大統領(건국 대통령) 雩南(우남) 李承晩博士(이승만박사)는 本貫(본관)이 全州(전주)이며 朝鮮朝(조선조) 太宗(태종) 王子(왕자) 讓寧大君(양녕대군)의 十五代孫(십오대손)인 敬善公(경선공)과 어머니 金海金氏(김해김씨)의 외아드님으로 1875년 3월 26일 黃海道(황해도) 平山郡(평상군) 馬山面(마산면) 大慶里(대경리) 內洞(내동)에서 탄생 하시었다.
1919년 三一(삼일)독립운동 후 大韓民國 臨時政府(대한민국 임시정부)의 初代 大統領(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셨고 1945년 민족해방 후에는 美蘇(미소)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간섭속에서 민족을 領導(영도)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 끝에 1948년 制憲國會(제헌국회) 의장으로 民主憲法(민주헌법)을 제정하고 初代 大統領(초대 대통령)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大韓民國(대한민국)의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며 1960년까지의 대통령 재임중 나라의 안보를 공고히 하고 국가발전의 大本(대본)을 확립하여 民族史上(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업을 이룩하시고 1965년 7월 19일 美洲(미주) 호놀룰루市(시)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享年(향년) 91세로 천수를 다하시니 전국민의 애도속에 7월 27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시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女史(여사)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市(시)에서 1900년 6월 15일 루돌프 도너 公(공)과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女史(여사)의 셋째따님으로 태어나시어 李承晩 博士(이승만 박사)와 1934년 10월 8일 뉴욕市(시)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독립운동가와 大統領(대통령)의 아내로서 극진한 내조와 근검절약의 귀감이시더니 1992년 3월 19일 梨花莊(이화장)에서 享年(향년) 93세로 서거 3월 23일 夫君(부군) 곁에 안장되시다.
유족으로 嗣子(사자) 仁秀(인수) 子婦(자부) 曺惠子(조혜자) 孫子(손자) 丙久(병구) 丙朝(병조)가 있다.
1998년 光復節(광복절)에 政府(정부)와 國民(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기념비
전면
大韓民國 初代大統領(대한민국 초대대통령)
雩南 李承晩博士 紀念碑(우남 이승만박사 기념비)
우남 이승만박사는 1875년에 탄생하여 1965년 91세로 서거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시니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1895년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과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1899년부터 옥고를 치렀으며 1904년 출옥 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가서 활약하시었다.
1905년부터 5년간 조지 워싱턴대학 하바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1945년 민족해방 후까지 그 법통을 지키며 해외에서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활동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었다.
해방후에는 미소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 간섭속에서 민족을 영도하여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로 1948년 총선거를 시행 제헌국회의장이 되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대통령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에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힘썼으며 1952년에 해양주권을 선언하여 국익을 수호 1953년에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강화하시었다.
1960년까지의 재임중 농지개혁 교육진흥과 민족문화창달 경제부흥과 산업육성 민주제도 실시와 복지향상 등 국가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우리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건에 대업을 이룩하시었다.
후면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복된 날을 누리게 해주셨거니와 모진 바람서리 시련의 시기에는 모세와 같은 일꾼을 보내시어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셨으니 조선왕조말에 태어나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고 자유민주국가를 창건하여 우리에게 건전한 생존과 원대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어른이 이승만 박사이시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시와 서예에 능하였고 젊어서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의 선구자로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대한의 주권보전을 요청하시었다.
공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수학 동서의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는 미국에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여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에 힘쓰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다. 三一독립운동 후에 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을 통할하고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 상해에 부임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였으며 그 직을 떠난 후에는 전권대사로서 국제연맹과 열강을 상대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시었다.
일제의 야망을 간파한 공은 태평양전쟁을 예언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의 국제승인에 주력하며 조국해방을 위한 특공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등 한국인의 대일 참전을 선도하시었다.
해방된 고국의 땅을 三三년만에 밟은 공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일깨우며 승전한 연합국에 우리의 완전독립과 三八선 장벽의 철폐 신탁통치의 반대와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그리고 자유 선거를 통한 민족자결을 요구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과 건국 노선을 천명하시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미소의 부당한 국제간섭 속에서 북한이 공산화되고 나라의 독립이 어렵게 되자 공은 온 민족을 영도하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을 추진 유엔으로 하여금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여 제헌국회를 소집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천년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하시었다.
공은 건국초에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국가안보를 강화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교육입국의 실현과 민족문화의 창달 민주제도의 시행으로 나라 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국가창건의 위업을 이룩하시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공의 생애는 바로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이니 중첩된 수난속에서 공의 거룩한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투시하는 예지와 암흑을 이겨낸 인내심과 우리를 지키신 대영단의 용기와 신뢰하는 경륜은 민족의 삶을 희망과 광명의 길로 영도하여 주시었다.
이승만 대통령 헌시비
전면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후면
한국의 큰 별
세계를 움직였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이곳에 고요히 잠드시다
구십평생을 자주와 독립으로
나라위해 몸 바치신 박사의
위대한 모습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하와이 동지들 정성을
모아 눈물을 마시며 삼가 이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