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 묘역의 면적은 총 4,137m²로, 건국 후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외교, 안보, 과학 분야에서 국가 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몸바친 국가유공자 총 70 위가 안장되어 있으며 국가유공자 제 1묘역, 제 2묘역, 제 3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국가유공자 제 1묘역
제 1유공자 묘역에는 1983년 10월 9일 대통령의 버마(現 미얀마) 방문을 수행하여 아웅산 묘소에서 참배행사를 위해 정부요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등 17위를 비롯하여 진의종 국무총리,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시조와 국토순례기행문,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쓴 노산 이은상 시인, 한국근대사에 관한 집중적 연구를 통해 학계와 문화계에 큰 공헌한 사학자이신 이선근 박사 등 40위가 모셔져 있다.
국가유공자 제 2묘역
제 2유공자 묘역에는 일제 강점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차장 겸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건국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물산장려운동 전개와 조선민주장 창당 등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김일성의 공산당에 맞서 노력한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등 14위의 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국가유공자 제 3묘역
제 3유공자 묘역에는 6·25전쟁 당시 베티고지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만술 대위, 1968년 청와대를 폭파할 목적으로 잠입한 무장간첩단(일명 '김신조 사건')을 격퇴하다가 전사한 최규식 경무관(당시 종로경찰서장), 북한의 항공기 납치 기도를 분쇄하고 순직한 대한항공 전명세 기장, 포스코를 건립하여 '제철보국'의 이상을 실현한 박태준 총리, 한국 경제의 태동기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여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진 남덕우 총리 등 총 16위의 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김만술 대위
육군 제1사단 11연대 2대대의 특무상사로 복무하다가 소위로 임관되어 1953. 7.15. 35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중공군 2개 대대와 맞서 적군 395명을 사살한 공로로 베티고지의 영웅이 되었다.
베티고지는 1사단 전초기지로서 임진강 건너 연천북방에 자리잡고 있어 휴전을 앞두고 국군과 공산군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곳이다.
1953. 7. 15. 새벽 김만술 소위는 35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하오 2시 30분 베티고지에 도착, 다음날 새벽까지 18회에 걸친 접전 끝에 고지를 점령하고 태극기를 꽂았다.
이날 결전에서 국군은 21명이 전사, 2명 부상하고 12명이 살아 남았다.
김소위는 1947. 6. 국방경비대에 입대, 여순반란사건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며, 6.25전쟁 중에는 水原, 大田 방어전, 서부 전선 방어전 등 무수한 격전을 치렀다. 1960년 대위로 예편 1990. 7.이후 전상부위 재수술을 받는 등 투병생활을 하다 1991. 5.28. 사망, 제17묘역 상단(국가유공자 제3묘역) 4번 묘에 안장되어 있다.
순국외교사절 17위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외국 순방길에 수행했다가 10월 9일 버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묘소 참배를 기다리는 중에 북한이 사전에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서석준(부총리), 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상공부장관), 서상철(동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민정당총재비서실장), 이기욱(재무부차관), 강인희(농수산부차관), 김용한(과학기술처차관), 김재익(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기획단장), 이계철(주버마대사), 민병석(대통령주치의), 이재관(대통령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기자), 한경희(경호관), 정태진(경호관) 등 17명이 순국하였다.
최규식 경무관
김만술 대위순국외교사절 17위최규식 경무관
최규식 경무관
최규식 경무관 묘역
최규식 경무관을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10분경에 청와대를 폭파하고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과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세검정 고갯길에서 근무 중에 "CIC 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 명이 세검정에서 자하문 쪽으로 도보 행진 중인데 검문에 응하지 않는다"는 경찰관이 올린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하고 곧바로 타격대 출동을 명령하는 한편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괴한들의 진출을 막고 신분을 확인하던 중 괴한들, 즉 무장간첩들의 선제공격을 받아 위독한 상태에서도 응사하면서 부하들을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에 순직하였다. 한 지역을 관할하는 치안책임자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호국정신의 귀감이 된 최규식 총경에 대해 정부는 1계급 특진 추서와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최규식 경무관은 1968년 1월 25일 치안본부(현 경찰청)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3묘역(17번 묘역 상단)에 안장되었다. 그가 쓰러진 청운동 자하문 고개와 경찰종합학교 교정에는 그의 투철한 사명감과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명세 기장
1932. 2.11. 만주 흥경에서 출생하여 1966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61년 2군사령부 비행대, 1965년 항공학교 등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1970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대한항공 (KAL) 조종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대한항공 조종사로 근무중인 1971. 1.23. 무장괴한이 항공기 납북을 기도하려고 기내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승객 60여명을 안전하게 구출하고 장렬히 순직하였다.
1등 보국훈장, 청룡봉사상(특별상), 5.16민족상(안보부문), 5등근무공로훈장 등 많은 수훈을 남겼으며, 국립묘지 제17묘역 2번 묘에 안장 되었다.
김현숙 대령
김현숙 대령은 평양 출생으로 1934년 일본 동경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강동여자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5월 여경훈련소 교관으로 한국 여자경찰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1949년 7월 여자배속장교 사감을 거쳐 예비역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후 중앙 학도청년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생포된 여자공비의 전향을 위해 참전하였다.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하여 1950년 9월 1일 육군 제1훈련소 안에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창설, 초대 교육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교육대에서는 여자배속장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하여 여자의용군 1·2기 874명을 양성함으로써, 전쟁기간 동안 국군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초창기 여군 창설의 주역들은 여자배속장교 출신으로 김현숙·박을희(朴乙姬)·현성원(玄聖元) 등 11명이었다.
1950년 10월 23일에는 현역에 정식 편입하여 활동하였다. 1951년 11월에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창설되면서 여군과장으로 보직되고, 편제개편에 따라 여군부장으로 있으면서 1955년 7월서울 용산에 여군훈련소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직까지 겸무하였다.
1953년 3월 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60년 9월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하기까지 여군 창설과 발전의 주역이었다. 예편 후 공화당 부녀분과위원장을 거쳐 제8대 전국구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국립묘지에 국가유공자 제3묘역 안장되었다.
김준
김준 초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은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시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농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촌 운동에 뛰어들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초대, 제2대, 제6대 회장을 역임하고, 1972년 초대 새마을지도연수원장을 맡아 새마을지도자 양성을 주도하였다. 새마을운동에 관한 한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꼽혔다.[1] '새마을운동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1980년에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공직에서는 물러났으며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가 사회단체 직능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농촌 운동과 관련된 기고 및 강연 활동을 벌였다. 《은혜로 마음밭을 갈며》 등의 저서가 있다.
김준은 '맨발의 성자'로 불린 종교운동가 이현필의 제자이다. 이현필 방식의 자선과 나눔의 삶을 김준이 그대로 새마을운동에 도입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박태준 국무총리
박태준 국무총리는 1927년 9월 29일 부산 기장 출생으로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68년에는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를 창립하여 한국의 '철강왕'이라 불리며 제철보국의 이상을 실현하는 한편 제철장학회, 학교법인 제철학원, 포항공과대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보국에도 힘썼다. 1980년 전두환 정부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한 이래 국회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2011년 12월 13일 급성 폐 손상으로 별세하여 12월 17일 사회장(포스코)을 치르고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