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번호
- 5243
제 46 묘역 소개
- 작성일
- 2018.05.14
- 수정일
- 2022.02.08
- 작성자
- 현충원
- 조회수
- 1316
개요 및 안장 현황
제46번 묘역은 6,25전쟁중 전사하신 분들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묘역으로 총 870위가 안장되어 있다.
연도 | 계 | 6・25전쟁중 | '54~'59 | ‘60~’69 | 기타 |
---|---|---|---|---|---|
사망 | 870 | 540 | 188 | 1 | 141 |
안장 | 870 | - | 780 | 86 | 4 |
안장배경
양구전투
‘51년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회담여건 조성과 한 치라도 더 많은 국토회복을 위해 양구전투에서 불타는 청춘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피의 능선 전투(‘51. 8. 18∼8. 22)
국군5사단과 미 2사단이 적 12사단 1연대와 27사단이 점령한 983고지일대를 빼앗기 위해 집중공격하게 된다. 이 고지는 적에게는 천연적인 방어를 제공하고 아군에게는 “눈 위의 혹”같아서 서로 983-938-773일대의 고지 군을 점령하기 위해 싸운 전투였다. 이 전투로 인해 적은 사살만 1,250명에 이르렀고 아군 역시 전사상자를 포함 1,030명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루 평균 3만여발, 최고 5만여발의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적이 설치한 2,000여발의 대인지뢰로 인해 수많은 발목절단 부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결사적 전투로 고지를 탈환하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1차:‘51. 9. 13∼ 9. 26, 2차:10.5∼10.13)
30여일간 미 제 2사단과 적 6사단, 12사단이 격렬하게총력을 경주한 전투로서 1일 평균 45회의 전폭기 출격과 1일 평균 1,000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931고지 일대에만 30여만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전투는 결국 적에게 1,470명의 전사자와 22,600명의 전상자를 안겨준 채 미 제2사단의 승리로 끝나 공산측은 휴전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아군 피해도 커 597명이 전사하고 3,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백석산 지구 전투(1차:51. 9.24,∼9.27, 2차: 9.30∼10.1)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출이 부진했던 시기에 국군 제7사단이 적 32사단, 12사단과 접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적 사살856명, 포로760명의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아군의 피해는 적었지만 전사 95명, 부상 29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중동부전선이 4키로 이상 북상하였고 인접부대의 진출을 엄호하면서도 서쪽고지군 일대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솔산 지구 전투(51, 6, 4∼6.19)
최초 미 해병 1사단이 공격을 담당하였으나 상당한 손실만을 입은 채 물러나고, 뒤이어 한국군 해병 1연대가 최초로 산악 전투에 투입되어 적 12사단을 격퇴하고 쾌승을 거둔 전투이다.
해병 1연대는 16일간의 전투에서 24개의 고지군을 탈취하고 칠흙같은 밤과 안개속에서도 귀신같이 적을 찾아내어 궤멸시켜 최초 “귀신잡는 해병”이란 칭호를 얻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전투로 3,263명의 적이 사살되었고 아군은 115명의 전사자와 603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가칠봉 지구 전투(1차:51.9.4∼10.14, 2차 : 10.27∼10.31)
국군 5사단이 2차에 걸쳐 적 2사단과 7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려 사살1,604명과 포로 270명 등 전과를 거두고 가칠봉을 확보한 전투이다. 특히, 김일성이 전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를 수차례 걸쳐 공격하여 종전 이후 155마일 휴전중 가장 높은 곳에서 적을 발아래 관측할 수 있는 고지인 가칠봉 1242미터를 수중에 넣었다. 이 전투로 아군은 전사 824명, 부상 4,200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추모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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