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에 능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20세 무렵부터는 다산 정약용의 문인들과 교우하며 실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으로 개항을 극렬히 반대하던 보수 유림인 화서학파 문인들과도 교우하며 자주적인 민족 의식을 갖춰갔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지식인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 주필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대한자강회의 <대한자강회월보>, 서우학회의 <서우> 발행을 맡는 등 홥발하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을 살리고자 역사서 집필에 나섰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서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 등에 이어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중국 관내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다. 동제사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중국의 신해혁명 인사들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였다. 동제사를 통한 인연으로 한중간의 우호관계가 구축되었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으로도 이어졌다.1915년 북경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한 그는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하고,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며 독립운동사료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정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21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을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항일 무장투쟁에 이르는 독립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기술한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기도 했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으로 면직된 후,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할 어른으로 추앙되어 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바로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임시대통령제를 개정하여 국무령체제 수립에 앞장섰다, 그리고는 만주 독립군의 상징적 인물인 석주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7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임시정부의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힘쓰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11월 1일 이역만리 중국 상해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민족의 통일’을 촉구하였다. 상해 만국공묘에 70여년간 안장되어 있던 유해는 1993년 8월에야 고국으로 돌아와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충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묘역이 조성되었다.
일화ㆍ어록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한국통사, 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