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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4

제8회 애국보훈선양대회 소감문(대상 2)

작성일
2016.09.27
수정일
2016.09.27
작성자
현충원
조회수
1405

제8회 애국보훈선양대회 대상 소감문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 강동지구 동신중학교 이ㅇ일

 

오늘 2016년 처음으로 오게 된 현충원은 날이 무척 더웠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고, 나는 그들에게서 열정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도 많이 와주어서 즐거운 봉사가 될 것임을 느꼈다.

가장 처음으로 했던 것은 ‘백범 김구’라는 애국자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었다. 김구도 어렸을 적 우리와 같은 말썽쟁이였고 평범한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실은 양반이라는 사실에 자신도 양반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을 다질 때 이름을 바꾸거나 호를 짓는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창암’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김구 선생은 ‘창수’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나는 자신의 결심을 다지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의지가 존경스러웠다. ‘105인 사건’ 이후 15년형을 선고받은 김구 선생은 또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그 당시 감옥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질식해 죽기도 하고, 겨울에는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기도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잠 잘 곳조차 부족하여 교대로 잠을 청하기도 하였다니, 15년형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창수’라는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백정의 ‘백’, 범부의 ‘범’을 따 자신보다 천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도 애국을 할 수 있다는 뜻의 ‘백범’을 호로 만들어 ‘백범 김구’ 선생이 탄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후 현충원에 대한 설명을 몇 가지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현충원은 6.25가 휴전한 후 2년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서울현충원에는 자리가 차 대전에도 현충원을 설립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전현충원도 곧 자리가 찰 것으로 보아 토지가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아파트 형식의 납골당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현충탑과 6.25전쟁 이후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분들과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위패봉안관에 갔다. 묵념을 하면서 숙연한 분위기와 함께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이분들이 없다면 ‘나는 지금 존재할 수 있을까?’와 같은 다양한 생각들이 겹쳐 흘렀다.

다음은 위대한 선열들의 얼을 포괄적으로 추모하는 재단인 충열대에 가보았다. 직접 대표로 분향을 해보아서 더욱 특별했던 시간이었다. 유관순, 신돌석, 스코필드 박사 등 역사책에서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이름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18대의 대통령까지 연임을 포함해 총 11명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정보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묘역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처음에는 잡초 뽑기 봉사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전에 다녀간 사람들이 거의 다 뽑아서 비석닦기 봉사로 대체하였다. 비석을 닦으며 그분들의 이름과 지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실 전쟁만 아니었어도 이곳에 계실 분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다들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이름들이 전쟁으로 인해 남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비석을 찬찬히 닦으면서 용사분들의 이름을 생각하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미처 이루지 못한 꿈들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은 영원할 것이고, 감사할 것이고,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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